Artist's Note -The Shadow of a Red Line (빨간 선의 그림자)
The Shadow of a Red Line
The Sense of Mine:
Art Nouveau refers to a new artistic movement that emerged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It is characterized by organic, asymmetrical curves often inspired by nature, such as flowers and vines. As with many artistic movements, it is difficult to pinpoint exactly where Art Nouveau began, but it is generally believed to have started in countries like France, which were undergoing the Industrial Revolution. Artists at the time sought to break away from traditional styles and explore new aesthetics, leading to the birth of the Art Nouveau movement.
Rather than finding beauty in the innovative components of industry, the artists of that era discovered new aesthetics in nature. This shift toward nature—beyond gods, kings, or religion— might seem progressive. However, considering the backdrop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which enabled the mass production of metal and machinery, this new aesthetic rooted in nature could be seen as a kind of regression. Although these artists used materials like metal, textiles, ceramics, and glass in their works, they chose not to find beauty in industrial elements. Instead, they pursued new forms of art in the natural world. What made them turn away from industrial aesthetics and seek beauty in nature?
Defamiliarization:
Nature in the City A revolution is the act of breaking away from established customs, institutions, or systems in a single, rapid stroke to establish something qualitatively new. The key words here are "single" and "rapid." Revolutions cannot occur without the consensus of the people, but even successful revolutions often lead to confusion. This confusion arises because people are forced to live in a space where the familiar laws, systems, and cultures have disappeared. When the familiar is shattered and new, strange things take their place quickly, confusion ensues.
Like revolution, art is always filtered through the self. It can stem from the mind, thoughts, judgments, perspectives, or philosophies. Art always carries a part of the self. In fact, the moment an artist selects a subject for expression, their involvement begins. To put it bluntly, art without a personal perspective has no reason to exist. This was likely the case for artists during the Industrial Revolution. In an era dominated by machines and capital, artists likely felt that the market was no longer "theirs." This feeling of alienation is not unfamiliar.
The Industrial Revolution often pushed art to the margins, and in response, many artists sought new aesthetics, rejecting the traditional styles of the Victorian era. Disillusioned by the mass production made possible by the revolution, they championed the importance of craftsmanship. Industry pushed them away, and they rejected the styles of the past. For these artists, industry could never be something that transformed through the self. To them, nature felt alien, intruding upon the industrialized urban landscape. Yet, because it was so familiar, nature became a new sensory experience in this industrialized world.
Art Nouveau and Cosmetic Surgery
Cosmetic surgery, like art, is a way of expressing one’s sense of beauty externally, manifesting it into a tangible result. Furthermore, cosmetic surgery, existing at the intersection of industry and art, bears a resemblance to Art Nouveau. Both the recipient and the practitioner contribute to the creation of subjective beauty.
Cosmetic surgery is the only field in medicine where a doctor’s personal aesthetic can come into play. For example, a doctor might choose to raise the height of a nose or subtly adjust the shape of a face based on their own preferences. In the past, cosmetic surgery typically involved replicating features from famous celebrities. Double eyelids, high noses, and smooth, oval faces were duplicated, becoming the standard for beauty. The most extreme example of this trend was the so-called “Gangnam beauty” phenomenon.
However, recent trends in cosmetic surgery have shifted. Today, people often bring in edited versions of their own faces, photoshopped to match their ideal image. Just as art history has seen movements overturning the past in the search for new beauty, only to return to nature, cosmetic surgery has similarly returned to the self, prompting a reevaluation of one’s own face. If Art Nouveau’s turn to nature was a product of circumstance, the return to the self in cosmetic surgery seems inevitable. Even the faces once regarded as uniquely beautiful, copied from others, were originally derived from nature. While these features may seem artificial to me, they are someone’s natural traits. Though art can elevate unfamiliarity and alienation into an aesthetic, alienation in cosmetic surgery cannot be aestheticized.
The difference lies in independence: while Art Nouveau’s creations can exist independently as works of art, cosmetic surgery remains confined to the face. Individuality is one thing, but alienation cannot be mistaken for individuality. Features once regarded as imperfections in a world of uniform beauty are now accepted as unique traits, but only when they are accompanied by a sense of naturalness. In other words, only when they feel like “mine.” Just as industry overtook spaces once dominated by nature, or as someone else’s features can now take over one’s face, recognizing what is truly mine within a sea of replicated beauty has become the new foundation for discovering beauty. During the rise of Art Nouveau, women were often depicted as passive objects of consumption. However, Alphonse Mucha’s work is said to have portrayed the inner lives of women. As a result, his work resonated more with women than with men. Similarly, cosmetic surgery is often seen as simply the pursuit of beauty, but those who undergo it may also be realizing their own desires for beauty. They may be individuals taking an active role in shaping themselves. Yet, this fact is often overlooked.
빨간 선의 그림자
나의 것이라는 감각 :
아르누보는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새로운 예술을 뜻한다. 꽃과 나무 덩굴 등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 정형적인 곡선의 요소가 특징이다. 양식이나 현상들처럼 아르누보 역시 그 시작을 누가 했는지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주로 산업혁명을 겪은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예술가들은 전통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학을 추구했으며, 그로 인해 아르누보라는 예술 운동이 탄생했다. 당대 예술가들은 혁신적인 산업의 구성 요소가 아니라, 자연에서 새로운 미학을 발견했다. 신이나 왕, 종교를 넘어 자연 에 발을 디딘 이 예술 흐름은 진보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일어나 금속과 기계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시대 적 배경을 고려하면, 자연에서 출발한 새로운 미학은 일종의 퇴보로 여겨질 수도 있다. 물론 당시 예술가들도 금속, 섬유, 도자기, 유리 등을 사용해 작품을 만들었으나, 산업적 요소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대신 자연적 요소에서 새로운 예술 을 추구했다. 왜 그들은 산업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고 자연에서 미학적 가치를 발견하려 했을까? 낯설게 하기,
도시 속 자연 :
혁명이란,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단번에’와 ‘급격하게’이다. 혁명은 사람들의 합의 없이 일어나기 어렵지만, 성공한 혁명에는 사람들의 혼란이 따르기 마련이다. 혁명으로 인해 사람들은 익숙했던 법이나 제도, 문화가 사라진 곳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혼란은 익숙한 것이 깨지고 낯설고 새로운 것이 급격히 들어선 자리에서 발생한다. 예술 역시 마찬가지로 나 자신을 거쳐 생성된다. 그것은 나의 마음일 수도 있고, 생각, 판단, 시선, 혹은 철학일 수도 있다. 예술은 어떻게든 나의 일부를 동반한다. 예술 작품을 창조할 때부터 나의 개입은 시작된다. 개인적인 시선이 없는 예술은, 다소 격하게 표현하자면, 존재할 이유 가 없다.
산업혁명이 활발히 일어났던 시기, 기계와 자본 중심의 시장은 예술가들에게 ‘나의 것’이 아닌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낯선 감각이 아니다. 산업혁명은 언제나 예술을 구석으로 몰아갔고, 실제로 당시 예술가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적 양식에 반발하며 새로운 미학을 찾고자 했다. 그들은 산업혁명으로 이뤄진 대량생산에 회의를 느끼고, 수공예의 중요성에 대해 논의했다. 산업은 그들을 밀어내었고, 그들은 과거의 양식을 거부했다. 그들에게 산업은 결코 자신을 거쳐 새롭게 변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당시 예술가들에게 자연은 산업화된 도시 속에서 이질적으로 끼어 있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더욱 새로운 감각 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르누보와 성형 :
성형은 자신이 느끼는 아름다움을 외적으로 표출하여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예술과 닮아 있다. 더 나아가 성형은 산업과 예술의 경계에 있다는 점에서 아르누보와 유사하다. 시술을 받는 사람과 시술하는 사람 모두 주관적인 아름다움을 결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성형외과는 의료 행위이면서도, 의사의 미학적 관점이 개입될 수 있는 유일한 분야이다. 예를 들어, 의사의 성향에 따라 코를 높이거나, 지나치지 않게 조절해 시술하는 등 취향이 반영될 수 있다. 과거 성형은 주로 연예인의 특정 부위를 복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쌍꺼풀 있는 눈, 높은 코, 계란형 얼굴 등 획일화 된 아름다움이 복제되듯 만들어졌고, 이러한 현상이 극단적으로 이루어졌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강남 미인’이다.
그러나 최근 성형의 트렌드는 변했다. 이제 사람들은 타인의 얼굴이 아닌, 포토샵으로 수정한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삼는다. 예술의 역사에서 과거를 전복하고 새로운 미를 탐구하던 흐름이 자연으로 회귀한 것처럼, 성형 역시 자신의 얼굴로 돌아와 다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아르누보의 자연 선택이 우연적이었다면, 성형의 회귀는 필연적일 것이다. 독보적이라고 여겨지던 타인의 얼굴 역시 자연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인공적인 아름다움일지라도, 그 얼굴은 누군가에게는 원래의 모습이다.
예술은 낯섦과 이질감을 미학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지만, 성형에서 이질감은 미학이 될 수 없다. 아르누보의 작품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성형은 얼굴 안에 영원히 담겨 있다. 개성은 개성일 뿐, 이질감은 개성이 될 수 없다. 획일화된 아름다움 속에서 콤플렉스로 여겨졌던 것들이 이제는 개성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이는 자연스러움이 동반될 때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나의 것’이라고 느껴질 때만 가능하다. 자연이 중심이던 자리에 산업이 들어서는 일, 내 얼굴에 타인의 이목구비가 들어서는 일, 복제된 아름다움 속에서 나의 것을 인식하는 일은 이제 새로운 가치로 자리 잡았으며,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아르누보가 발발한 시기, 수동적으로만 소비되던 여성의 모습과 달리, 알폰스 무하의 작품은 여성의 내면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남성보다 여성들에게 더 큰 공감을 자아냈다. 성형은 그저 아름다움을 좇는 사람들의 것이라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더 능동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이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점을 쉽게 간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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